파괴적 패러다임 변화 시대의 디자인
발표자: 이건표 (홍콩 폴리텍대학교 디자인대학 학장)
오늘날 우리는 급격한 패러다임의 변화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본 발제에서는 이에 대응하는 디자인의 역할 및 시사점과 도시의 공공 디자인의 지향점에 대하여 논의해보고자 합니다. 디자인 영역의 패러다임 변화에 대한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과거와 현재의 현상을 바라보고 우리가 패러다임 전환의 시점에서 어떻게 변화하고 대응해야 하는지 이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Evolutionary Change and the Future
디자인은 늘 긍정적인 변화를 추구합니다. 변화는 지속성과 소셜임팩트의 파급력에 따라 그 범위와 영향력이 결정됩니다. 우리 주변에는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일시적인 작은 변화(Fad)들이 있습니다. 작은 변화들이 1년 여정도 지속되었을 때 패셔너블(Fashionable)한 ‘유행’으로 일컫고, 이들 중 더 오랜 기간 강력하게 지속되는 것들을 우리는 ‘트렌드’라 부르며 간혹 30~40년 주기로 등장하는 맥락을 ‘패러다임’이라고 합니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나타날 때에는 기존의 이론이나 관념 체계(Theory), 프레임워크, 방법론, 정의와 같은 것들이 더 이상 작용하지 않고,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나타나면서 다소 파괴적인 분열과 혼란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일정한 학문 분야가 이러한 혼란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다면 그 학문은 더욱 발전할 뿐만 아니라 고유의 영역이 더욱 확고해질 수 있으나 그렇지 못하면 분야가 사라지기도 합니다. 이에 우리는 변화의 흐름을 살피고 대응할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1. Changing rule of Game in Design
지난 15~20년의 시간 동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변화를 보면, 디자인 영역의 게임의 규칙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000년대 초・중반 까지만 해도 엘지, 삼성, 소니 등 전자제품을 다루는 동종 업계의 대기업들은 일정한 경쟁구도 안에서 유사한 목표를 향해 안정적인 경쟁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최근 가전의 스마트화로 인해 하드웨어를 다루는 전자 사업부 뿐만 아니라 애플, 아마존, 페이스북과 같은 플랫폼 기업이 관계되면서 동종 업계의 범주가 확대되었고, 정형화 된 분야의 경계 또한 허물어졌습니다. 이러한 현상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시스템 변화와 플랫폼의 성장에 따라 우리가 새롭게 인식해야 할 규칙은 무엇인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2019년 저명한 경제지 포츈(Fortune)에서는 ‘가장 유명한 현대 디자인 100선(The greatest designs of modern times)’’을 선정한 바 있습니다. 이 연구는 포츈지와 IIT (일리노이 공과대학) 디자인 대학의 공동 협의로 진행되었습니다. IIT의 디자인 대학을 창립한 J더블린교수는 1959년, 당대 가장 유명한 제품 디자인 100선을 선정하여 ‘One Hundred Great Product Designs’ 라는 책을 집필한 바 있는데 구성 내용을 보면 주로 자동차, 냉장고, 소비재 및 가구를 비롯하여 모든 것이 물리적인 형태를 지닌 제품(industrial products)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로부터 50년이 지난 2019년 포츈에서 선정한 디자인 작품들을 보면 기존의 소비재와 하드웨어군도 포함되어 있지만 인터넷 서비스, 소프트웨어, 헬스케어 등 분류가 다양해 진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분화에 따라 디자인은 독립적으로 전개되기보다 영역 확장과 융합의 변화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https://fortune.com/longform/100-best-designs)
2. AI is also beginning to design
‘Design with AI and Data’
AI와 빅데이터 역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큰 변화 중 하나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사람들이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고 거리 두기, 또는 격리 생활이 이어짐에 따라 OTT시청 비율이 증가하였습니다. 이들 사례 중 하나인 넷플릭스의 한 개발자는 “넷플릭스는 300만가지의 다른 디자인 버전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가능한 일일까요? 넷플릭스는 AI를 통해서 사용자 개인의 시청 태도 및 관심 분야를 수집하고, 사용자 모델링을 통해 개인 맞춤형 인터페이스를 제공하기 때문에 그 가능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우리는 AI와 빅데이터 모델링, 그리고 디자인 과정의 반복에서 디자이너의 존재가 점점 사라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동안 인간 고유의 영역이었던 사고와 실행의 영역을 AI가 대체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 또한 굉장히 큰 패러다임의 변화라고 볼 수 있습니다.
3. Forced acceptance of Virtual Experience
또 한가지는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한 패러다임 변화입니다.
2019년도 2월, 많은 도시의 기업과 학교는 문을 닫게 되었고 대면이 어려운 상황에서 업무와 교육을 진행해야 하는 불가피한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억지로 강요된 변화의 수용은 초반에 여러가지 시행착오와 혼란을 겪었지만 결과적으로 긍정적인 측면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사회적으로 원격 교육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왔고 디자이너들의 원격 협업 필요성 또한 논의되어 왔으나 기회와 계기가 없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팬데믹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비대면 환경이 조성되다 보니 원격 협업과 가상 경험이 일상화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팬데믹이 끝난다 하더라도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가 경험했고 더 이상 낯설지 않은 가상 경험을 어떻게 수용하고 발전시켜 나갈 것인가 고민해야 합니다.
Development of Paradigms and Change
과거 공예 중심 시대에 기계문명의 등장은 장인들의 핵심 능력을 대체하게 되었고, 디자이너는 주로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이후 컴퓨터의 등장으로 누구나 그림을 잘 그리는 시대가 되었고, 디자이너에 대한 인식 또한 변화하였으며, 컴퓨터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디자인씽킹(Design thinking), 인터랙션(Interaction)과 사용자 중심 디자인(User centered Design) 등의 개념이 새로운 디자인의 핵심 역량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AI와 빅데이터 기반의 기술이 등장하면서 우리는 미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시대 별 디자이너의 모습을 살펴보면, 산업혁명 이전의 디자이너는 잠재된 기술을 가진 장인(craftman)과 같았습니다. 이후 외관을 개선하고 심미적 요인을 추가하는 스타일리스트(stylist)로 인식되었고, 최근의 디자이너는 산파(midwife)와 같이 촉진자(facilitator)역할을 수행합니다. 비전문가들이 스스로 창조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조력자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시대 별 사용자는 어떻게 변화 했을까요? 산업혁명 이전에는 사용자의 개념의 거의 없었고 자급자족을 위한 생산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산업혁명 이후 대량생산과 함께 거대 소비자층이 형성되었고, 다수를 대상으로 한 디자인이 일방적으로 보급되었습니다. 컴퓨터가 적극적으로 개입되기 시작한 오늘날의 환경에서는 사용자의 개인적인 욕구와 취향에 대한 시장 세분화와 사용자 맞춤형 디자인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사용자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사용자 중심 디자인(User centered design), 참여적 디자인(participatory design)이 나타났고 이제는 사용 주체가 직접 디자인 과정에 참여하거나 이를 주도해 나가고 있습니다.
디자이너가 다루어 온 문제를 살펴보면, 과거의 디자이너는 대상 그 자체가 어떻게 보여지는가(How)에 대해 주로 고민하면서 프로세스의 실행 단계에 무게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에는 디자이너 스스로 무엇을 디자인 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프로세스의 프론트엔드로 그 관심사를 확장하였고, 최근에는 경험에 대한 논의와 더불어 플랫폼 형태의 에코시스템을 이야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패러다임 전환의 시기에 우리가 스스로 생각해 볼 것은 근본적으로 ‘이것이 왜 필요한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또한, 변화의 시기에 우리는 공통적으로 전문가들의 핵심역량 민주화(Democratization)를 경험하고 새로운 디자인 문제(New design problem)와 방법론, 프로세스를 필요로 하며 새로운 질문(New question)을 제기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수작업으로 문자의 도안을 정교하게 그려내던 디자이너의 역량은 컴퓨터와 디지털 폰트의 등장과 함께 누구나 사용할 수 있도록 민주화(Democratization)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민주화의 개념과 새로운 디자인 문제, 새로운 질문이라는 세 가지 관점은 오늘날 도시의 공공 디자인과 소셜 이노베이션에 동등하게 적용하여 거대 담론을 형성해 볼 수 있습니다.
1. 디자인의 민주화 (Democratization)
공공 디자인과 소셜 이노베이션 영역에서는 민주화의 측면이 디자이너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논의와 연결됩니다. 공공 영역의 디자인은 적극적으로 사람들의 행동을 변화시키고, 기부와 공유를 유도하거나 사회에 직접적으로 기여합니다. 예를 들어, 각진 휴지심을 만들어 두루마리 휴지를 불필요하게 낭비하지 않도록 하거나 밴딩머신을 통해 제3세계의 오염된 물을 판매하는 방법은 디자인으로 기부를 유도하는 좋은 사례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사례들이 확산되면서 디자인 씽킹과 워크샵, 여러 방법론들이 민주화되고 누구나 참여 가능한 프로세스가 생성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전문가의 영역이 민주화 되고 있는 환경에서 오늘날 디자이너의 아이덴티티와 포지셔닝은 어떻게 변화해야 할까요?
이에 대한 답변으로 임파워링 디자인(Empowering design)의 개념을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용자들은 완성된 제품을 구매하여 사용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만약 완제품이 아닌 사용자 스스로 만들고 완성해나갈 수 있는 미완성의 제품이 제공된다면 어떨까요? 대다수의 사용자들은 이를 기반으로 각자 일상의 맥락과 행동 특성에 맞추어 개인화 된 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때 사용자의 창조 활동을 위해서 전문가인 디자이너는 재가공과 크리에이션을 위한 단서들을 제공할 수 있고, 일련의 창작활동을 이끌어내는 촉진자 역할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2. 새로운 디자인 문제 (New Deisgn Problem)
1983년 컴퓨터가 처음 등장하고 확산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컴퓨터를 활용하여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 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당시 새로운 정보 환경과 디자인에 대한 콘퍼런스가 개최되었는데 오프닝 스피치에서 언급된 내용을 발췌하면, “산업혁명은 1950년도에 끝났다. 이제 새로운 정보 환경이 도래하였고 디자이너들이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역할을 위해 시도하지 않는다면 디자이너의 주어진 운명은 이내 소멸할 것이다. 산업 디자이너는 대장장이(blacksmiths)로, 그래픽 디자이너는 식자장이(linotype men)로 남을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마찬가지로 패러다임의 전환에 맞추어 우리가 새로운 역할에 대해 고민 하지 않는다면 디자인의 영역은 쉽게 사라져버릴 수도 있습니다. 디자이너들은 컴퓨터의 등장으로 새로운 디자인 문제에 접근하였고 기술 활용을 위한 인터랙션 디자인과 UX 디자인, 인터페이스의 개념이 등장하였습니다. 이처럼 새로운 기술의 수용과 활용을 위해서는 새롭게 발생하는 디자인 문제를 인식하고 깊이 고민할 수 있어야 합니다.
3. 새로운 질문 (New Question)
최근 빅데이터와 AI에 대해 자주 논의하게 되는데 AI 기술을 활용함에 있어 인터페이스와 프로세스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겠지만 ‘이러한 기술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이것이 올바른 방향인가?’라는 질문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할 때는 늘 대역폭의 여지가 있습니다. 자율성과 동기가 있고 규범이 존재하지 않는 초기 단계를 지나 패러다임이 정착하게 되면 일정한 기준과 정형화 된 규범이 생깁니다. 때문에 우리는 초기 단계에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답을 구하며 방향성을 설정해야 합니다. 일부 디자이너와 석학자들의 책을 보면 인간 중심의 사고를 확장하여 우주에 존재하는 생태계와 더 나은 세계에 대한 이야기들이 등장합니다. 이런 주제에 대한 접근이 오늘날 공공과 소셜 이노베이션의 영역에서 새로운 질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디자이너는 새로운 기술과 동향이 등장하면 이를 이용하여 새로운 디자인을 도출해냅니다. 우리는 현재 가지고 있는 리소스를 이용해 미래를 결정합니다. 기술을 전제로 대상을 만들어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디자이너가 여러 이해관계자들과 먼저 미래를 예측하고, 생각하는 바람직한 미래를 구현하기 위해 기술과 정책 등을 함께 만들어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크리스토퍼 알렉산더의 ‘Notes on the synthesis of form’에서는 산업혁명 이후 새로운 정보 환경이 구축되는 과정에서 패러다임 전환에 대한 내용을 언급하면서, “우리는 순수함을 잃었습니다. 순수함은 한 번 잃어버리면 되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상실을 부정하기보다 이를 경계하고 주의해야 합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our innocence is lost. […] the innocence, once lost, cannot be regained. The loss demands attention, not denial.”) 여기서 순수함은 기존의 디자이너들이 가지고 있던 방법론과 관점, 가치와 같은 것들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모두가 디자인 하는 시대가 도래하였고, 이로 인해 우리는 디자인 영역의 포지셔닝과 아이덴티티를 고민해야 하는 패러다임 변화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디자인 핵심 역량의 민주화와 디자인 프로세스 및 방법론 변화에 따른 디자인 문제의 발견, 새로운 질문을 통해 기술과 환경의 변화들이 시사하는 점에 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