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디자인 거버넌스
지난 달 서울 성동구에서는 ‘공공디자인 주민협의체’를 구성했다. 전국 최초 디자인 분야 주민 참여 기구로서 상설 협의체로 운영하는 성동구의 ‘공공디자인 주민협의체’는 8명의 주민들과 전문위원 4명, 디자인 전문가 2명, 공무원 1명 등 총 15명으로 구성했다. 협의체를 통해 공공디자인을 비롯한 관련 사업에 신속하게 주민 의견을 수렴하고, 전문가 의견을 조합하여 디자인 방향을 설정할 수 있게 됐다. 주민들을 위한 하나의 소통 창구가 마련된 것이다.
다원화되고 복잡해진 현대사회에서 소수 디자이너의 직관적인 아이디어만으로 결과물을 도출해오던 이전의 디자인 과정은 시민들의 필요(Needs)를 충족시키기에 역부족인 경우가 많았다. 자연스레 디자인 과정에 시민 참여와 이해관계자 및 전문가 협력, 자생력과 지속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혁신적인 운영 방식에 대한 필요성이 부각됐다. 불특정 다수를 의미하는 공(公)과 함께 한다는 의미의 공(共)이 더해진 공공디자인은 이미 다양한 주체의 참여와 함께 과정을 만들어가는 협력, 모두가 누릴 수 있는 공공성의 가치를 내포하고 있다. 이 같은 공공디자인의 가치 실현을 위한 전략으로 활용되는 것이 ‘문제해결을 위한 다양한 방법’이라는 관점에서의 거버넌스이다.
시대가 추구하는 사회 조정 양식의 변화에 따라 스스로 진화하는 거버넌스는 그 개념을 한 가지로 명확히 규정하기 어렵다. 1960년대 그리스어로 ‘키잡이’를 뜻하는 ‘Kubernetes’에서 유래하여 정치적으로 국가가 방향타를 잡는 역할에 관한 의미로 활용되었지만 민주주의와 시민사회 발전으로 점차 그 개념이 확장되어 현대에는 다양한 조정 양식론과 협력의 방법론을 결합하여 사회문제를 조정하고 관리하는 ‘메타 거버넌스(Meta governance)’의 개념에까지 이르렀다. 즉, 메타 거버넌스의 관점에서 거버넌스는 협치, 참여를 넘어 ‘사회문제 해결과정의 조정양식’이라는 광의적 의미로 해석한다. 공공영역에서 사회가 요구하는 다원화된 필요와 문제 해결을 통해 공공성과 시민들의 만족도를 높여야 하는 공공디자인에 있어 이 같은 개념의 거버넌스는 매우 중요한 실행 전략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몇 가지 사례를 통해 현재 공공디자인 영역에서 나타나고 있는 거버넌스의 양상을 살펴보고 그 의미를 되짚어 보고자 한다.
참여와 협력을 통한 시너지 창출, 헬싱키 칼라사타마
다양한 주체의 참여를 통한 디자인 과정은 협업을 통해 더 큰 효과를 창출한다. 거버넌스는 단순히 의사결정 방식뿐 아니라 디자인 과정 전반에 작용하여 결과물의 직접적 사용자인 시민과 각 분야 전문가, 협력 관계의 기업 등이 참여하게 하는 방법으로 활용되고 있다.
핀란드 수도 헬싱키에는 ‘물고기 항구’라는 의미의 ‘칼라사타마’라는 지역이 있다. 쇠르내이넨(Sörnäinen)이라는 산업도시에 속한 칼라사타마는 산업화 시기였던 19세기부터 철도와 항만이 들어서면서 100년 넘게 대표적인 항구 도시로 발전했다. 그러나 점차 주변 지역에 항구가 들어서면서 급격한 쇠퇴를 맞게 됐고 급기야 2008년 모든 항구의 운행을 멈췄다. 사람들의 발길도 도심의 활기도 사라진 칼라사타마에는 새로운 대안이 필요했다. 헬싱키는 도심의 인구 집중 현상과 환경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칼라사타마에 스마트시티를 계획하기로 했다. 2035년까지 탄소배출 제로화를 선언한 헬싱키는 2013년 칼라사타마에 리빙랩(Living Lab) 시스템을 도입하여 다양한 도시 실험과 주민 참여를 통한 친환경 스마트시티를 육성하기 시작했다. 10년이 다 되어가는 현재까지 유럽을 대표하는 스마트 시티 사례로 손꼽히는 헬싱키의‘스마트 칼라사타마 프로젝트(Smart Kakasatama Project)’는 공공디자인 거버넌스를 통해 지속가능한 도시를 함께 만들어 가고 있다.
‘Piloting smart and sustainable solutions (똑똑하고 지속가능한 솔루션 파일럿 실험)’
주민, 기업, 공무원 등 이해관계자가 함께 만든 헬싱키 스마트시티 지구 [출처] https://fiksukalasatama.fi/en/building-blocks/project-portfolio/
칼라사타마에는 첨단 기술력을 앞세운 모빌리티, 스마트 버스승강장과 같이 기존 스마트시티들이 자랑하는 시설물보다 더욱 이목을 끄는 것이 있다. 애자일 파일럿 프로그램 ‘노페앗 꼬께일룻(nopeat kokeilut)’이 그중 하나다. ‘빠른 실험’을 의미하는 이 프로그램은 지자체가 지역 중소기업의 서비스를 도시 기반 시설과 연결해 서비스를 실제 실험해 볼 수 있게 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핵심은 지역 주민들을 비롯한 정부, 자치단체, 대학 등이 함께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스마트 기술 실험에 사용자 의견을 반영한다는 점이다. 주민들은 자신이 직접 사용하게 될 도시 시설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가지고 실험에 임하고, 기업은 사용자의 의견을 수렴하여 완성도 높은 시설을 도시에 반영할 수 있다. 이 같은 방식을 체계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결성된 ‘포럼 비리움 헬싱키(Forum Virium Helsinki)’는 칼라사타마 외에도 헬싱키 여러 지역에서 이 같은 도시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또한 도시, 기업 및 주민 간 협력을 증대하고 유연하게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는 협력과 애자일 방식을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도록 실천 위주의 가이드를 담은 포켓북(Pocket Bool for Agile Piloting)을 배포하고 있다. 주민, 기업, 학자, 공무원 등 이해관계자로 구성된 ‘칼라사타마 혁신가클럽(Innovator’s Club)‘은 이 같은 실험을 운영하기 위한 네트워크 그룹이다. 이 그룹을 중심으로 공동체가 모여 서로 의견을 나눈다. 이 같은 노력을 통해 도시 곳곳에서 다양한 주체가 함께 커뮤니티를 이루며 지역에 필요한 똑똑한 자원들을 만들고 지속해 가고 있다. 주민과 이해관계자들의 참여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협력의 결과는 공공의 이익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참여와 협력을 통한 거버넌스의 순기능을 엿볼 수 있다.
[출처] https://fiksukalasatama.fi/en/
전문성을 활용한 역량강화, 성대골 에너지자립마을
칼라사타마 사례처럼 여러 주체가 네트워크를 통해 의견을 주고받으며 협력하는 방법도 있지만 지역이 추구하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주민들이 직접 능력을 배양하고 역량을 강화하여 지속가능성을 증진하는 방법도 있다. 주로 주민을 대상으로 교육 컨설팅을 하거나 이해관계자들 간에 워크숍을 통해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 방안을 모색하며, 인큐베이팅과 같은 방법을 수행한다.
[출처] 성대골사람들 홈페이지, http://sdgpeople.or.kr/
기후변화의 위기 속 자생적으로 에너지자립을 이뤄가는 마을이 있다. 동작구 상도 3, 4동에 위치한 성대골은 2012년부터 10년 넘게 지역 시민단체와 주민들이 주도적으로 에너지 전환 운동을 펼치고 있다. 2010년 성대골에는 주민들에 의해 지역 도서관이 건립됐다. 도서관을 중심으로 지역 커뮤니티가 활성화되기 시작할 무렵, 2011년 후쿠시마에서 터진 원자력 발전소 사고소식을 접하고 주민들 스스로 환경과 에너지 문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후 주민들은 환경단체의 협조를 구해 문화와 교육을 통한 에너지 전환운동을 펼쳤다. 2012년부터 2014년 까지는 서울시 ‘에너지자립마을사업’에 참여하면서 재생가능에너지와 적정기술로 마을학교 겨울나기를 진행하기도 했다. 또한 마을에 속한 5개 단체로 구성된 ‘마을닷살림 에너지협동조합’을 결성해 에너지 전환을 지향하는 ‘에너지슈퍼마켓’을 온, 오프라인을 통해 만들었다.1) 박정문, 성대골아너지자립마을 활동백서,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 서울대이공대신문사펀드모임, 2017.
2014년부터 협동조합은 에너지효율개선사업을 진행하면서 ‘기후변화&에너지 강사양성과정’과 ‘에너지리빙랩 프로젝트’라는 교육프로그램과 리빙랩 실험도 진행하고 있다. 주민들은 작은 도서관에 모여 에너지 효율 개선방법을 배우거나, ‘햇빛발전 협동조합’을 주진하며 에너지 생산 및 효율 개선을 위한 뜻 깊은 활동을 펼치고 있다. 또한 성대골 절전소를 중심으로 2012년 시작한 에너지를 절약하는 운동, ‘에너지 전환운동’은 성대골 공동체가 에너지 진단사가 되어 주택에 대한 에너지 진단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하고, 동작구 환경과와의 협업을 통해 ‘에너지 클리닉’을 운영한다. 에너지 전환 교육은 2011년 우리동네 녹색 아카데미를 시작으로 마을에서 환경, 에너지와 관련한 다양한 교육 및 워크숍을 진행했다. 주민들을 에너지 교육자로 양성하고 ‘찾아가는 에너지교실’을 만들어 지역 학교에서 에너지 교육을 하기도 한다. 단순히 사용자에 대한 수혜에 그치곤 했던 도시의 디자인. 이와 달리 성대골 에너지자립마을은 주민 스스로 환경과 에너지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역량을 강화하는 거버넌스 과정을 통해 새로운 지역 아이덴티티를 만들고 자생적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점에 큰 가치가 있다.
권리이양을 통한 지속가능성 및 건전성 확보, 민와일 스페이스
지역에 존재하는 자산을 거버넌스 과정을 통해 공공이 이용할 수 있는 공공재나 지역 자산으로 활용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지역의 유·무형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하거나 관리하여 경제적 가치를 높이는 커먼즈(Commons)와 같이 시민들이 권리가 이양된 지역 자산을 운영하여 부가적인 이익을 창출하기도 한다.
민와일(Meanwhile)은 영국에서 비어있는 공실 또는 유휴부지를 사회적, 경제적 이익을 위해 임시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마련한 방안이다. 공사, 허가, 매매 기간 동안 적지 않게 발생하는 유휴공간으로 인한 슬럼화를 예방하고자 영국의 공공기관인 DCLG(Department of Communitues & Local Goverment)가 시작한 방안이다. DCLG는 2009년 유휴공간 임대법을 제정하면서 민와일 프로젝트를 확대했다. 지역 민와일 프로젝트 가이드에 따라 세입자가 들어오기 전까지 짧은 기간 사회적 기업과 비영리 조직이 비어있는 공간을 활용하게 했다. 가든이나 팝업, 소규모 기업의 창업 공간 등으로 활용하며 민간과 공공 소유의 유휴공간을 활용하는 ‘민와일 프로젝트’는 지역 사회 활성화와 상생을 위한 방안으로 각광받고 있다.
‘로보러 정크션(Loughborough Junction)지역에 철도아치 프로젝트’
[출처] https://www.meanwhile.org.uk/articles/8-arches-504-505-in-loughborough-junction
램버스(Lambeth)지역의 로보러 정크션(Loughborough Junction)은 2008년 이후 중심 시지가를 중심으로 공실이 늘어나면서 그대로 방치된 철도 밑 공간을 활용할 방안을 고민했다. 철도 밑 공간의 공실은 관리비 부담을 가중시켰고, 이곳의 관리 부서인 철도청은 ‘민와일 스페이스’와 협업을 시작하기로 했다. 민와일 스페이스는 2차에 걸쳐 총 19곳을 선별하여 지역 주민들을 위한 워크숍이나, 사업 등 위한 용도로 공간을 대여했다. 공공 부문에서 민간 부문에 자산을 이전하고 개발하는 과정을 통해 철도의 소유주인 철도청은 지역 공동체를 위한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동시에 공실세를 절감하는 혜택까지 얻었다. 이렇게 공공의 자산 등을 민간에 이양하여 활용하게 하는 방안은 지역에 문화, 예술 등 사업을 활성화 시키도록 하는 지원책이 된다. ‘민와일 프로젝트’가 플랫폼을 통해 지역 자산을 공공이 함께 누릴 수 있게 함으로써 방치됐던 유휴공간이 경제적 이윤을 창출하고 지역에 필요한 공간으로 활용된 거버넌스 사례이다.
공공디자인 거버넌스가 안내하는 즐거운 항해길
위의 세 가지 사례가 보여주는 참여와 협력을 통한 시너지, 전문성 활용 역량강화, 권리이양을 통한 지속가능성의 확보라는 거버넌스 양상은 그 내용이 조금씩 다르지만 공공이 직면한 문제와 주민들이 이루고자하는 지역 사회 가치 구현을 보다 주민과 함께 능동적으로 이루고 있다는 점에 공통점이 있다.
‘공공디자인에 관한 국민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렴하며, 의사결정 과정에 국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방안을 마련한다. <공공디자인 진흥에 관한 법률 제10조 4항>’
공공디자인은 법률을 통해 디자인 과정에 국민들의 참여와 협력을 비롯한 ‘다양한 방안’ 마련을 명시한다. 이러한 방안들은 이미 다양한 조정 양식론과 협력의 방법론을 결합한 사회문제 조정 방식을 지향하는 관점에서의 공공디자인 거버넌스를 도구로 실현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건강하게 작동하는 공공디자인 거버넌스는 시민 누구라도 ‘거버넌스’라는 배키를 함께 잡고 내가 사는 우리 지역에 꼭 필요한 가치를 찾아 항해하도록 안내할 것이다. 앞으로도 공공디자인 거버넌스를 활용한 지역 사회의 다양한 문제해결 과정들이 더 많은 시민들의 공감과 지역에 대한 자부심을 불러일으키길 기대해 본다.
<참고문헌>
홍익대학교 공공디자인연구센터, 공공디자인 진흥을 위한 거버넌스 모델(P.D.G.12) 연구, 2019.
이명석, 거버넌스 신드롬,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17.
윤찬영, 금전적 보상도 없는데... 세계 최고 스마트 시티에서 벌어지는 일, 오마이뉴스, 2020.11.22.
양철승, 사람을 위한 스마트시티 헬싱키 칼라사타마, 따뜻:한난
박정문, 성대골에너지자립마을 활동백서,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 서울대이공대신문사펀드모임, 2017.
[동네 한바퀴] 주민이 사랑하는 ‘성대골 에너지자립마을’, SH톡톡, VOL.32
이종규, 성대골에 가면 그린 뉴딜이 보인다, 공감, 2021.04.05.
김상희, 영국의 민와일 프로젝트: 유휴공간을 활용하는 한시적 도시계획, 건축과도시공간 Vol.34, 2019
백진아 기자, ‘디자인 방향을 묻다’... 성동구, ‘공공디자인 주민협의체’ 구성, 성동저널, 2022.11.21.
Meanwhilespace 홈페이지, https://www.meanwhilespace.com/availablespaces
Smart Kalasatama 홈페이지, https://fiksukalasatama.fi/en/
글 | 김상아 (홍익대학교 공공디자인연구센터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