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마음으로, 지속가능한 뇌성마비 아동 의복디자인
- 관리자
서울시 디자인거버넌스 백서. 2016-2019년 동안 일반시민, 유아/어린이, 노인, 장애인, 다문화, 노동자, 동물을 대상으로 진행했던 프로젝트들이 소개되어 있다. | 자료제공: 서울시
생활 속 불편을 아름답고 효율적으로 개선하는 공공디자인. 공공디자인의 ‘니즈'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상황으로부터 시작된다. 첫째, 문제 상황이 너무 익숙해서. 둘째, 해결 방안을 모색할 방법을 알지 못하거나 관리주체의 사각지대에 있어서. 셋째,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쉽게 발견하지 못할 때이다. 성공적인 공공디자인으로의 첫 출발선이 사용자의 불편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에서부터 비롯되어야 하는 이유다.
시민의 목소리로 완성하는, 디자인 거버넌스
서울시가 2015년 시작한 ‘디자인거버넌스’는 디자이너나 행정 전문가가 아닌 시민에서부터 출발한다. 일명 ‘내세내구(내가 낸 세금으로 내가 직접 구현하는)’ 사업 형태로 시민이 현장의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시정에 참여해 다양한 이해관계자들과 협력하여 개선해 나가는 방식이다. 전문가 심사와 시민 투표 등 광범위한 협업 과정을 거쳐 솔루션을 적용해가며 디자인을 통한 문제해결역량까지 기를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2015년부터 2020년까지 총 5,732명의 시민이 참여하고 29건의 제안이 ‘디자인거버넌스’ 사업의 최종 주제로 선정됐다.
‘뇌성마비 아동 의복문제 해결 디자인'은 앞서 말한 공공디자인 니즈를 발견하기 어려운 경우 중 세 번째인 ‘특수한 상황'에 해당하는 사례다. 해당 상황에 놓인 시민이 상대적으로 많지 않아 디자이너나 행정 전문가가 자세히 들여다보기가 쉽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했다. 지난 2016년 뇌성마비 자녀의 신체에 맞지 않는 의복으로 고민하던 한 어머니의 제안으로 2년간 시민, 시정, 기업이 함께 더 나은 일상을 누릴 수 있도록 지속 가능한 리폼 시스템을 만들어낸 가슴 따뜻한 이야기를 지금부터 소개해보려 한다.
뇌성마비 아동 의복문제 해결 디자인으로 개발된 턱받이를 착용 중인 모습|자료제공 : 서울시
많은 뇌병변 장애인들이 연령에 맞는 물품이 없어 청소년기에도 유아용, 아동용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기성복을 그대로 입기 어려워 지퍼를 달거나 신축성 소재로 바꾸는 등 개조에 가까운 수선이 필요해요.
STEP 1.
혼자서는 어려웠던 의복 리폼 문제,
다 함께 힘을 합치면 해결할 수 있을까?
뇌성마비는 뇌가 충분히 성숙하기 이전에 기능이 손상되어 운동능력과 자세에 장애를 일으키는 질환이다. 우리나라에도 소수의 뇌성마비 환우가 있지만 상대적으로 사회적 관심에서는 소외되어 왔다. 성인기에 이르기까지 보호자에 대한 의존도가 높고 필요로 하는 지원의 형태가 구체적이고 절실함에도 불구하고 지원은 열악한 상황이다. 뇌병변의 경우 부위와 동작의 양상이 다양하고 중증의 경우 신체를 지지하거나 교정해 주는 도구가 필요하기도 하다. 따라서 기성복을 편안하게 착용하고 원활하게 몸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별도의 리폼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보호자에게 휠체어, 몸을 교정시키는 도구인 ‘이너Inner' 등 의복과 함께 사용해야 할 관련 장치들과, 방수와 세탁 등 의복의 기능까지 고려한 리폼은 보호자에게도 쉽지 않은 일. 난이도가 높아 수선집에서 문전박대를 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장애 특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잘못 수선이 된 옷을 받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이러한 어머니들의 어려움을 접한 국립재활원의 연구사가 뇌성마비 장애아동 부모의 커뮤니티 회원들과 함께 의복 수선 과정을 개선하고 싶다는 아이디어를 디자인거버넌스에 제안했고, 본격적으로 ‘뇌성마비 아동의 의복문제 해결을 위한 서비스디자인’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제안자와 함께한 회의 모습 & 프로젝트 팀 회의 모습|자료제공 : 서울시
어떻게 하면 부모들의 시간적 부담을 줄이고, 지속 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을까?
STEP 2.
자생적 커뮤니티로의 첫 발걸음!
뇌성마비 환우 & 의복전문가 & 수선전문가가 만나다
프로젝트팀은 중증중복뇌병변장애인부모회(중애모) 회원과 의상・산업・서비스 디자이너, 재활 전문가 등으로 꾸려졌다.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는 지속 가능한 시스템을 위해 먼저 수요자와 공급자를 연결하는 온라인 플랫폼들을 살폈다. 논의 끝에 프로젝트팀은 리폼 수요자와 의복 전문가, 지역 내 수선 자원을 커뮤니티로 연결하는 자생적 서비스 모델을 디자인했다. 지역 기반 시니어클럽 등, 양재 인력을 보유한 기관과 연계해 리폼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방안도 포함됐다.
또한, 초기 개발 과정 이후에도 서비스 모델이 안정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리폼 노하우를 모아 소통 가능한 패턴으로 정리했는데, 여기서 두 가지 아이템이 고안되었다. 리폼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도 쉽게 그 방법을 익힐 수 있는 리폼 가이드북 <리・폼・나>가 그것이다. 또한, 안정적인 서비스 운영을 위해 상대적으로 많은 수의 환우들이 자주 구매할 수 있는 공용 아이템 턱받이, 휠체어용 무릎발싸개를 개발했다.
리폼 가이드북 <리・폼・나>|자료제공 : 서울시, 사진 : 516스튜디오
리폼을 통해 우리 아이들도 폼나는 옷을 입을 수 있게 하자!
STEP 3.
주문은 간편하게, 착용은 편리하게
막막했던 의복 리폼은 이제 안녕!
리폼 가이드북 <리・폼・나>는 환우 가족과 수선 전문가의 의사소통을 돕기 위한 디자인이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중증중복뇌병변장애인부모회(중애모) 회읜 중 리폼 기술을 보유한 어머니의 노하우를 참고하여 상의와 하의의 자세한 리폼 방법과 옆 트임, 뒤 트임, 이너벨트 구멍내기 등의 특수한 기술을 도면화하고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기존에 자주 발생하던 의사소통의 실수를 줄여 줄 주문서 양식과 작성 방법, 유의사항도 수록했다.
휠체어용 무릎발싸개|자료제공 : 서울시
공용 아이템은 중애모 회원들의 투표를 통해 선정했다. 연령대를 불문하고 뇌성마비 아동에게 꼭 필요하지만 유아용 디자인밖에 없었던 ‘턱받이’, 그리고 휠체어 바퀴에 끼거나 떨어지지 않고 초가을부터 겨울까지 안정적으로 다리를 감싸줄 수 있는 ‘휠체어용 무릎 발싸개’다. 프로젝트팀은 기존 사례를 분석하고 연령대별 적절한 형태, 제작비 등을 두루 고려해 디자인을 완성했고 의료용 유니폼 제작사인 ‘나비수’가 제품을 제작하고 공급했다.
고가의 수입품에 의존하지 않고도 아이들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기구들을 자체적으로 제작하여 준비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STEP 4.
더 많은 환우가
보다 다양한 의복을 경험할 수 있도록
2016년 당시의 구상된 서비스 디자인 원안도 인상적이지만, 뇌성마비 아동 의복디자인 개선 프로젝트의 의의는 원안이 지금까지 점점 더 많은 관심을 받으며 꾸준히 개선되고 있다는 데에 있다. 중애모 내부에 디자인팀이 신설됐고 서울시 역시 제작비를 지원하여 2017년에는 추가 공용 아이템인 보조기용 방한 덧신이 제작됐다. 2018년에는 시민참여형 사업으로 선정되어 팔꿈치 보호대, 무릎 보호대, 남녀 이너웨어가 추가로 개발됐다.
2018년 추가 공용 아이템으로 선정되어 새롭게 디자인된 보조기용 방한 덧신|자료제공 : 서울시
또한, 서울시는 의류 지원을 제안해 온 ‘에프알엘코리아(주)’와 함께 2016년 서비스 개발 후 도입하지 못했던 의류 리폼 시스템을 완성했다. 그 결과 2019년부터 에프알엘코리아(주)가 서울시 보조공학센터 네 곳에 리폼 전문 인력과 리폼 재료, 1인당 4-5종의 의류를 제공했다. 당해 서울시 거주 뇌병변 장애인을 포함한 지체장애인 383명을 대상으로 1,912벌의 리폼 의류를, 이듬해인 2020년에는 서울과 부산에 거주하는 800명에게 리폼 의류가 지원됐다.
서울시, 한국뇌성마비복지회, 에프알엘코리아(주)가 함께 한 ‘뇌병변 장애인 의류리폼 지원사업’을 통해 꼭 맞는 옷을 입게 된 최관 환우|자료제공 : 서울시
서울시, 한국뇌성마비복지회, 에프알엘코리아(주)가 함께 한 ‘뇌병변 장애인 의류리폼 지원사업’에서 리폼 작업을 지원한 재단사 이상종 님. |자료제공 : 서울시
시민, 시정, 기업이 참여한 지속가능한 문제해결디자인
다수의 건의 사항뿐만 아니라 곳곳에 숨어 있는 필요를 파악해야 하는 공공디자인. 그중 ‘뇌성마비 아동 의복문제 해결 디자인’은 공공디자인의 선순환을 보여주는 감동적인 사례이다. 환우들이 몸에 맞지 않은 기성복을 억지로 입을 일도, 의복을 입고 벗는 과정이 부담스러워 외출을 꺼릴 일도 이제는 없다. 나아가 실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시민의 목소리로 시작해 민간과 전문가, 시정, 기업이 함께 손을 잡고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이들이 함께 문제를 풀어나간 3년간의 과정은 보다 다양한 지속가능한 문제해결디자인을 위한 단단한 씨앗이 되어 줄 것이다. 공공의 영역에 숨어있는 불편 사항을 '함께' 발견하고 '함께' 개선해나갈 또 다른 이야기들을 기대해본다.
글 | 디자인프레스 유미진 기자(designpress2016@naver.com)
진행·편집 | 디자인프레스 권예랑
취재 협조 및 자료 제공 | 서울시 문화본부 디자인정책과